장화 (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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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화는 서진 시대의 문학가이자 정치가로, 뛰어난 문재와 정치적 식견을 갖춘 인물이었다. 위나라에서 벼슬을 시작하여 중서랑을 거쳐 서진 건국 후 황문시랑, 중서령 등 요직을 역임하며 오나라 정벌에 기여하여 광무후에 봉해졌다. 사마염의 사후 태자소부로 중앙 정계에 복귀했으나, 팔왕의 난에 휘말려 사마륜에게 처형당했다. 사후 복권되어 명예를 회복했으며, 저서로는 『박물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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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 (서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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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장화 |
원어 이름 | 張華 |
로마자 표기 | Zhang Hua |
자 | 茂先 (Maoxian) |
작위 | 광무후 (廣武侯) 장무공 (壮武公) |
출생 | 232년 |
출생지 | 고안현, 하북 |
사망 | 300년 5월 7일 (68세)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장평 |
배우자 | 유방의 딸 |
자녀 | 장이 장위 |
경력 | |
관직 | 사공 (司空): 296년 3월 ~ 300년 5월 7일 중서감: 291년 ~ 296년 3월 경 시중: 291년 ~ 296년 우광록대부: 291년 ~ 296년 태상경: ? ~ 290년 안북장군 호오환교위 상서: 280년 ~ ? 황문시랑: 265년 이후 ~ ? |
군주 | 진 혜제 |
직업 | 시인, 정치인 |
2. 생애
장화는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하여 양을 치는 목동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학문에 정진하여 문학적 재능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의 시는 완적에게 "이 사람은 제후를 보좌할 수 있는 인물이다!"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뛰어났다.[4] 위나라 말기, 완적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올라 중서랑을 역임했다.[4]
고향 출신 관료 유방은 장화의 재능을 알아보고 자신의 딸과 결혼하도록 주선했다.[2] 같은 군 출신인 노식의 손자 노진 역시 장화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3] 선우사는 장화를 범양태수로 추천하여 태상박사에 임명되었고,[15] 노진의 추천으로 사마소에게 발탁되어 하남윤승으로 전임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임명되기 전에 좌저작랑에 임명되었다. 잠시 후 장사로 옮겨 중서랑(궁중의 사안에 관여)을 겸했다. 조의에서 그의 표주가 많이 채택되어 곧 중서랑이 본직이 되었다.
278년 12월, 양호가 위독해지자 사마염(무제)은 장화를 보내 오나라 정복에 대한 전략을 물었다. 양호는 손호가 유능한 통치자로 교체되기 전에 빠른 정벌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고, 장화는 이에 동의했다.[6] 279년, 왕준과 두예가 오나라 정벌을 건의하자, 사마염은 장화와 바둑을 두던 중 바둑판을 치우고 정벌을 강력히 건의받았다. 오나라 정벌이 결정된 후, 장화는 탁지상서(度支尙書)에 임명되어 물자 조달을 담당했다.[7] 280년, 정벌이 시작되어 진군이 승승장구했으나, 가충 등은 정벌 중지를 주장했다. 장화는 계속 정벌할 것을 주장했고, 가충은 사마염에게 장화를 처형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러나 사마염은 장화를 옹호했다. 결국 왕준이 석두성(石頭城)을 점령하고 손호를 낙양으로 압송하여 오나라가 멸망했다. 그러나 정벌에 반대했던 순욱 등의 시기로 장화는 권력 다툼에서 밀려났다.[8]
281년, 사마염이 장화에게 후계자를 누구로 정하면 좋을지 묻자, 장화는 사마염의 동생인 제왕(齊王) 사마유를 추천하였다. 그러나 사마염은 태자 사마충(司馬衷)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때를 틈타 순욱 등이 장화를 모함하자 사마염은 도독유주제군사(都督幽州諸軍事)로 삼아 변경으로 내보냈다.[8] 장화는 부임하자, 예전부터 살던 백성을 위무하고 새롭게 유입된 백성도 차별 없이 받아들여, 이민족·한족을 가리지 않고 크게 칭송받았다. 동이라고 불리는 마한과 신미 등의 제국은 산과 바다로 격리된 아주 먼 곳에 위치한 곳이었고, 역대 중화 왕조에 대한 종속을 거부했으나, 장화의 통치 이후에는 모두 사신을 보내 조공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유주 원방에 할거하는 이민족도 복종하게 되었고, 국경 지대의 근심은 사라졌다고 한다.[8] 사마염은 다시 장화를 불러들이려 했으나, 가충과 순욱 일파였던 풍담(馮紞)이 이를 반대하여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풍담은 사마소가 종회를 지나치게 중용한 결과, 성장한 종회가 반란을 일으킨 예를 들며, 지방에서 병권을 쥔 장화를 경계하도록 사마염에게 참언했기에, 사마염은 장화를 조정에 초빙한다는 말을 두 번 다시 하지 않았다.[8] 나중에 태상(太常)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파면되었고, 이후에도 열후였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조정에 참내하여 천자에게 배알하는 것은 할 수 있었지만, 사마염 시대에는 무관의 상태로 지내게 되었다.[8]
291년 가남풍의 쿠데타 이후, 장화는 조정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으나 권력 다툼은 더욱 심화되었다. 장화는 가남풍에게 사마위를 제거할 것을 건의하여 실행에 옮기게 했다.[9] 296년 사공(司空)에 임명되었으며,[10] 저족과 강족의 반란 진압에 맹관을 추천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300년, 사마륜의 쿠데타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장림은 장화가 사마휼 폐위 당시 적극적으로 막지 못한 것을 꾸짖었으나, 장화는 자신의 간언이 남아있음을 주장하며 죽음을 맞이했다.[16] 장화의 죽음 이후, 그의 명예는 복권되었다.[11]
2. 1. 초기 생애와 위나라 출사
장화는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집안이 가난하여 젊은 시절에는 양을 치는 목동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학문에 정진하여 문학적 재능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의 시는 완적에게 "이 사람은 제후를 보좌할 수 있는 인물이다!"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뛰어났으며, 완적의 평가는 장화의 명성을 더욱 높였다.[4]고향 출신 관료 유방은 장화의 재능을 알아보고 자신의 딸과 결혼하도록 주선했다.[2] 같은 군 출신인 노식의 손자 노진 역시 장화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3] 선우사는 장화를 범양태수로 추천하여 태상박사에 임명되었고,[15] 노진의 추천으로 사마소에게 발탁되어 하남윤승으로 전임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임명되기 전에 좌저작랑에 임명되었다. 잠시 후 장사로 옮겨 중서랑(궁중의 사안에 관여)을 겸했다. 조의에서 그의 표주가 많이 채택되어 곧 중서랑이 본직이 되었다.
위나라 말기, 완적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올라 중서랑을 역임했다.[4]
2. 2. 서진 건국과 오나라 정벌
278년 12월경, 양호가 위독해지자 사마염(무제)은 장화를 보내 오나라 정복에 대한 전략을 물었다. 양호는 손호가 유능한 통치자로 교체되기 전에 빠른 정벌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고, 장화는 이에 동의했다.[6]279년, 왕준과 두예가 오나라 정벌을 건의하자, 사마염은 장화와 바둑을 두던 중 바둑판을 치우고 정벌을 강력히 건의받았다. 오나라 정벌이 결정된 후, 장화는 탁지상서(度支尙書)에 임명되어 물자 조달을 담당했다.[7]
280년, 정벌이 시작되어 진군이 승승장구했으나, 가충 등은 정벌 중지를 주장했다. 장화는 계속 정벌할 것을 주장했고, 가충은 사마염에게 장화를 처형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러나 사마염은 장화를 옹호했다. 결국 왕준이 석두성(石頭城)을 점령하고 손호를 낙양으로 압송하여 오나라가 멸망했다. 그러나 정벌에 반대했던 순욱 등의 시기로 장화는 권력 다툼에서 밀려났다.[8]
2. 3. 유주 통치와 중앙 정계 복귀
281년, 사마염이 장화에게 후계자를 누구로 정하면 좋을지 묻자, 장화는 사마염의 동생인 제왕(齊王) 사마유를 추천하였다. 그러나 사마염은 태자 사마충(司馬衷)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때를 틈타 순욱 등이 장화를 모함하자 사마염은 도독유주제군사(都督幽州諸軍事)로 삼아 변경으로 내보냈다.[8]장화는 부임하자, 예전부터 살던 백성을 위무하고 새롭게 유입된 백성도 차별 없이 받아들여, 이민족·한족을 가리지 않고 크게 칭송받는 존재가 되었다. 동이라고 불리는 마한과 신미 등의 제국은 산과 바다로 격리된 아주 먼 곳에 위치한 곳이었고, 역대 중화 왕조에 대한 종속을 거부했으나, 장화의 통치 이후에는 모두 사신을 보내 조공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유주 원방에 할거하는 이민족도 복종하게 되었고, 국경 지대의 근심은 사라졌다고 한다.[8]
사마염은 다시 장화를 불러들이려 했으나, 가충과 순욱 일파였던 풍담(馮紞)이 이를 반대하여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풍담은 사마소가 종회를 지나치게 중용한 결과, 성장한 종회가 반란을 일으킨 예를 들며, 지방에서 병권을 쥔 장화를 경계하도록 사마염에게 참언했기에, 사마염은 장화를 조정에 초빙한다는 말을 두 번 다시 하지 않았다.[8] 나중에 태상(太常)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파면되었고, 이후에도 열후였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조정에 참내하여 천자에게 배알하는 것은 할 수 있었지만, 사마염 시대에는 무관의 상태로 지내게 되었다.[8]
2. 4. 팔왕의 난과 죽음
291년 가남풍의 쿠데타 이후, 장화는 조정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으나 권력 다툼은 더욱 심화되었다. 장화는 가남풍에게 사마위를 제거할 것을 건의하여 실행에 옮기게 했다.[9] 296년 사공(司空)에 임명되었으며,[10] 저족과 강족의 반란 진압에 맹관을 추천하여 성공을 거두었다.300년, 사마륜의 쿠데타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장림은 장화가 사마휼 폐위 당시 적극적으로 막지 못한 것을 꾸짖었으나, 장화는 자신의 간언이 남아있음을 주장하며 죽음을 맞이했다.[16]
장화의 죽음 이후, 그의 명예는 복권되었다.[11]
3. 평가
장화는 뛰어난 문학적 재능과 정치적 식견을 겸비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완적은 장화를 "왕을 보좌할 재능이 있다!"라고 칭찬했다.[4] 학식이 깊어 이사할 때 서고를 옮기는 데 서른 대의 수레가 필요했다고 한다.[2] 다양한 관심사를 다룬 논문집인 『박물지』의 저자이기도 하다. 이 책은 송나라 시대에 소실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 전해지는 것은 다른 책에서 발췌한 내용을 모아 편집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화는 책을 매우 좋아하여 사망 당시 집에는 남은 재산이 없었지만, 책상과 책장에서 넘쳐날 정도로 많은 서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세상에 거의 유통되지 않는 희귀한 책이라도 장화의 집에는 소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비서감 지어는 관서를 선정할 때 모두 장화가 소장하고 있는 서적에서 교정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장화는 박식하고 치밀한 점에 있어서는 당시 그와 견줄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2]
장화는 재능 있는 인재를 좋아하고 추천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가난하고 천한 신분이라도 좋은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 칭찬하고, 그 사람이 정당한 지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왔다. 『삼국지』를 저술한 진수는 촉한 멸망 후 불우하게 지냈지만, 장화에 의해 효렴으로 천거되었다.[2] 문학가 좌사는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평가받지 못했지만, 장화가 그의 재능을 극찬하자 명성이 알려져 낙양에서는 앞다투어 그의 저서 『삼도부』를 필사했다. 오나라의 명장 육항의 아들인 육기와 육운 형제도 장화로부터 추천받았다. 그 외에도 모용외, 장궤, 도간, 유자원 등 차세대 인물들도 젊은 시절 장화에게 평가받았다.[2]
반면, 위충(韋忠)은 장화를 화려하지만 실속 없는 사람으로 평가했다.[2] 『자치통감』에 주석을 단 호삼성은 가남풍의 폐립을 결단하지 않은 장화가 보신을 우선시했다고 비판하며 "장화는 혼란한 조정을 다스리며 위관(공경)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그 마음은 이와 같았다(가남풍의 폐립에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늘이 조왕 륜을 도왔고, 그를 주살하게 되었다"라고 평가했다.
장화의 시는 32수가 전해지고 있다. 자신의 뜻과 귀족에 대한 불만을 담은 시를 제외하면 부부의 이별과 그리움을 읊은 『정시(情詩)』 5수가 있다. 『박물지』 외에도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는 『장화집(張華集)』 10권이 수록되어 있으나 이미 사라졌다. 명대(明代) 장부는 『한위육조백삼가집(漢魏六朝百三家集)』에 『장무선집(張茂先集)』을 수록하였다.
4. 기타
장화는 여러 가지 기이한 이야기와 관련된 일화가 전해진다.
- 서진이 막 흥성할 무렵, 무제 사마염은 조정 신하들에게 한나라 왕조의 궁궐 제도에 대해 자문했고, 장화는 막힘없이 대답하고 땅바닥에 궁궐 도면을 그려내어 그의 식견을 절찬받았다. 당시 사람들은 장화를 자산에 비유했다.[18]
- 오나라의 옛 신하인 육기 형제는 장화와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옛 친구 사이처럼 교류했으며, 그의 덕스러운 행동을 보고 스승의 예로 장화를 공경하게 되었다. 장화가 주살된 후, 육기는 그를 위해 뢰사를 보내고 '영덕부'라는 부를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18]
- 원강 5년(295년) 10월, 낙양의 무고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장화는 사마륜 등의 정변을 두려워하여 병력을 배치하여 방비를 굳힌 후에 소화에 나섰다. 그 때문에 소화 활동이 늦어져 귀중한 보물들이 소실되었다.[18]
- 영강 원년(300년) 3월, 여러 이변이 잇따라 보고되자 장화의 아들 장위는 관직을 사임할 것을 권했으나, 장화는 천명을 기다리겠다며 따르지 않았다. 며칠 후 사마륜의 정변으로 장화는 처형되었다.[18]
- 장화가 처형된 후, 평락향후 염찬은 장화의 시신 앞에서 통곡하며 천명을 언급했다.[18]
장화의 전에는 다음과 같은 괴이담 종류가 수없이 실려 있다.
- 장화의 봉지인 장무군에서 뽕나무가 측백나무로 변하거나, 역택과 관사에 요괴가 나타나고, 낮잠을 자다 지붕이 무너지는 꿈을 꾸는 등 기이한 일들이 일어났다.
- 295년 10월 무고 화재 때, 장화는 한 자루의 검이 지붕을 뚫고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 사마충 시대에, 어떤 사람이 털이 긴 새를 장화에게 보여주자, 장화는 이것이 해모이며 천하가 혼란해질 징조라고 말했다.
- 육기가 장화의 집에 젓을 보냈는데, 장화는 이것이 용의 고기라고 말하며 쓴 술로 씻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씻어보니 오색 광채가 일어났다.
- 낙양의 무고 안에서 꿩 울음소리가 들리자, 장화는 뱀이 꿩으로 둔갑한 것이라고 말했고, 무고를 열어보니 꿩 옆에 뱀 허물이 있었다.
- 오군 임평에서 둑이 무너지고 석고가 나왔는데, 장화는 촉 땅의 오동나무로 물고기 모양을 새겨 두드리면 소리가 날 것이라고 했다. 그대로 해보니 소리가 수 리 밖까지 들렸다.
- 오가 멸망하기 전, 두수와 우수 사이에 자줏빛 운기가 솟아올랐는데, 장화는 예장 출신 뇌환과 함께 천문을 점치고 보검의 정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확인했다. 뇌환을 풍성 현령으로 임명하여 보검을 찾게 하였고, 뇌환은 옥사 아래에서 용천, 태아 두 자루의 검을 발견했다. 뇌환은 장화에게 검 한 자루와 흙을 보냈고, 장화는 검을 소중히 여기며 뇌환에게 편지를 보냈다. 뇌환이 세상을 떠난 후, 아들 뇌화가 검을 가지고 가다 물에 빠뜨렸는데, 두 마리의 용이 얽혀 있는 모습이 보이고 검은 사라졌다.[20]
장화의 가계는 전한의 장량으로 이어진다고 하며, 그의 후손들은 당나라 시대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장위의 아들 장여와 장위의 계통은 모두 당대까지 이어져, 측천무후 시기의 당나라 재상 장간지는 장위의 자손, 현종 시기의 재상이었던 장열은 장화의 13세손, 같은 재상인 장구령은 장화의 14세손으로 전해진다.[18]
참조
[1]
서적
Book of Jin
[2]
서적
Jin Shu
[3]
서적
Jin Shu
[4]
서적
Jin Shu
[5]
서적
Jin Shu
[6]
서적
Jin Shu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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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 Shu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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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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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 Shu
[10]
서적
Jin Shu
[11]
문서
[12]
서적
Jin Shu
[13]
문서
[14]
서적
Liang Shu
[15]
서적
中国小説史略 上
ちくま学芸文庫
[16]
문서
『資治通鑑』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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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문서
[19]
문서
[20]
문서
[21]
서적
Jin 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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